이왕 통곡의 벽의 수호신으로 오해받는 참이니, 차라리 장단을 맞춰 주고 얘기를 들어보는 게 낫겠다.
자기 이름을 '갈립'이라 소개한 노인의 이야기는 아주 오래 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갈립 젊을 적에 저는 성마른데다 투지가 만만한 청년이었죠.
갓 스물을 넘겼을 때 절 죽이려 드는 사람들이 생겨서, 사막으로 도망을 왔습니다만...
도중에 모래 폭풍을 만나 짐을 모두 잃고 길까지 잃었더랬죠.
라이트 사막에서 길 잃는 것만한 봉변이 따로 없지.
갈립 맞습니다, 이제 막 죽는구나 하던 참에, 어느 유목민 처녀가 절 구해주었죠.
그녀의 이름은 '아딜라'였어요.
갈립의 표정이 풀어지더니, 희미한 미소가 입가에 떠오른다.
라이트 꽤 아름다운 여인이었나 봐.
갈립 네, 무척 아름다운데다, 두 눈은 보석처럼 빛이 났었죠.
라이트 (보석같은 눈...)
이유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지나의 얼굴이 떠오른다.
라이트 아딜라도 사나운 성격이었어? 구해주고 나서 당신을 손아귀에 쥐고 흔들었느냐 말야.
갈립 당연히 아니죠! 왜 그런 생각을 하신 겁니까?
아딜라는 무척 상냥했어요. 자신의 부족 야영지에 절 데려가, 여러 날 동안 절 돌봐줬죠.
라이트 그럼 당신이 운이 좋았던 모양이네.
사람을 구해주는 여자들이 다 그렇게 상냥한 건 아니더라고. 더러 엄청 사나운 경우도 있어.
나는 지나의 모습을 머릿속에서 지워 보려고 머리를 세게 흔든다.
라이트 쿨럭...얘기 계속해.
갈립 전 어렸을 적부터 쭉 집도 의지할 가족도 없었어요.
그 유목민 부족이 사막을 건너 흰 코뿔소 마을로 가려 한다는 걸 듣고는, 그냥 그들과 동행하기로 했죠.
여정 중에 아딜라와 저는 사랑에 빠졌고요.
라이트 휴...사랑은 언제나 끝도 없이 문제를 달고 다닌다니까.
난 절대 그렇게 쉽게 사랑에 빠지진 않을 거야.
갈립 하지만 위대한 수호신이시여, 아딜라와 전 당신과는 달라요. 언젠가 죽고 말 평범한 인간입니다.
라이트 그건 맞아...
갈립 흰 코뿔소 마을에 가서 정착한 다음, 아딜라와 결혼할 생각으로 가득했죠.
하지만 흰 코뿔소 마을이 가까워 올수록 아딜라가 점점 슬퍼 보이는 거에요.
끝내 저를 피하기 시작하더니, 말조차 걸지 않더군요.
라이트 어떤 여자들은 별 이유도 없이 해까닥 하기도 해. 한밤중에 사막 벌판까지 쫓아올지도 모른다니까.
갈립 아뇨...아딜라는 그런 여자는 아니었어요. 분명히 이유가 있을 거라 짐작했죠.
계속해서 이유를 물은 끝에 대답을 들을 수 있었어요.
갈립의 눈에 수심이 드리워 온다.
갈립 아딜라의 아버지는 유목민 부족의 족장이었고, 흰 코뿔소 마을 귀족들의 초대에 응한 참이었어요.
부족의 유랑 생활을 끝내기 위해, 아딜라가 그곳 귀족들 중 한 명과 결혼해야 했던 거에요.
라이트 평소 사랑이란 걸 좋게 보지는 않았어도, 그 심정은 이해가 가네...
아딜라가 속으로 갈등하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슬퍼하고 또 당신을 피해다녔던 거야.
내가 당신이었다면 난-
- 그녀와 도망친다
라이트 이유가 뭐가 됐든, 한 사람의 자유와 행복을 그런 식으로 희생하면 안 되는 거야!
잠시 동안은 행복한 척 자신을 속일 수 있겠지만, 당신과 아딜라는 서로 떨어지게 된 걸 두고두고 후회할 거라고.
갈립 저도 그렇게 생각해서, 마음을 정하고 그녀와 함께 도망칠 기회를 물색했어요.
- 조용히 곁을 떠난다
라이트 사랑도 물론 소중하지만, 의무도 똑같이 중요해. 아딜라가 부족을 버리고 간대도 남은 평생을 후회하지 않을 수 없을걸.
그녀에게 그런 고통을 줄 바에는, 인연을 끊고 자기 인생을 살도록 보내주겠어.
갈립 휴...안타깝게도 열정만 가득하고 치기 어린 그때의 저는, 오로지 그녀와 도망갈 생각만 가득했습니다.
일을 쉽게 하려고 일부러 낙타를 다른 방향으로 몰아 시간을 벌었죠.
하지만 함께 도망치기로 한 바로 그날 밤, 도적 떼가 들이닥쳤어요.
모두가 용감히 맞서 싸워 도적들을 몰아냈지만, 거기서 아딜라의 부족 사람들 반이 죽었죠.
라이트 당신 마음이 안 좋았겠는데.
우울한 표정으로 갈립이 시선을 내리깐다.
갈립 맞아요. 아딜라는 자책하며 함께 도망치기를 포기했어요.
그저 도시로 향해 정략 결혼을 받아들이기로 한 거죠.
라이트 하지만 그건 도적 떼 탓이었잖아!
아딜라가 귀족들과 결혼한다고 죽은 부족민들이 살아돌아오진 않을 텐데.
갈립 위대하신 수호신께선 아마 이해하지 못하시겠지만, 대다수의 평범한 인간들은 평생 후회를 안고 살아갈 순 없어요.
이를테면, 우리의 도피 계획 때문에 일부러 경로를 바꾸지만 않았더라면...그런 비극은 애시당초 없었을지도 모르죠.
그 사건으로 아딜라는, 결혼을 받아들여야만 부족의 운명이 좀더 나아진다는 걸 깨달은 거에요.
전에 내게도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것 같은, 이상한 느낌이 마음 한켠에서 솟아난다.
라이트 다른 사람들을 지키려고....
아마 어떤 사람들은, 날 때부터 다른 이들을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만 같지...
갈립 그때의 저는 아무 힘도 없어, 그녀와 그녀의 부족민들을 지켜줄 수 없었죠.
그래서 속으로 울분을 삼키고 떠나야 했습니다.
갈립은 시름 가득한 긴 한숨을 내쉰다.
갈립이 이야기를 마쳤을 때는 거의 새벽이 다 되었다.
라이트 그래서 이게 당신에게 한평생 남은 후회라는 거지, 허어...
그 뒤로 몇 년이나 지났는데?
갈립 벌써 50년이 다 된 일입니다.
갈립은 폐허의 키 큰 기둥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갈립 우리가 경로를 바꾸고 나서, 그 유목민 부족이 이 폐허에 야영지를 차렸었죠.
이곳이 바로 그 도적떼가 들이닥친 곳입니다.
라이트 지금 여기?!
얼떨결에 나는 서 있던 통곡의 벽에서 바닥으로 뛰어내린다.
갈립 위대한 수호신이시여, 보십시오-
갈립이 가리키는 곳을 유심히 보니, 폐허 근처에 이상한 나무 하나가 보인다.
잎은 이미 시들어 마른 가지만이 옹이 지고 비틀려 있다.
새벽빛 아래 그 나무는 마치 금박을 두른 듯 빛난다.
라이트 저런 나무는 전에 본 적이 없는데...신기하네.
갈립 이건 이 폐허 근처에서만 자라는 희귀종인데요. 어떻게 당신이 모르실 수가?
라이트 어어...너무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더니, 세세한 건 많이 잊어버렸나 봐.
갈립 그렇군요. 저건 '센티멘탈 아카시아'라는 나무입니다. 비록 지금은 다 시들어 버린 것 같지만...
오십 년 전, 처음 저 나무를 보았을 때 숨이 멎을 정도로 아름다운 황금빛 이파리가 가지마다 가득했죠.
피가 낭자했던 그 밤이 지나고, 새벽녘에 바로 이 나무 아래서 아딜라에게 작별을 고했어요.
라이트 그 뒤로 한 번도 그녀를 찾지 않은 거야?
갈립은 고개를 젓는다.
갈립 비록 한시도 그리워 않은 적이 없었지만, 그녀 앞에 놓인 새 인생을 망치고 싶지 않았어요.
한 번이라도 보러 몰래 찾아갈 생각도 했었지만, 혹시 절 알아차린다면 그 마음에 슬픔만 더할 것 같아서요.
그래서 흰 코뿔소 마을에는 한 번도 발을 들이지 않았죠.
담담히 애기하는 듯 보이지만, 그의 눈가는 비탄과 갈망으로 가득 차 있다.
갈립 하지만 이제 늙고 병들어 기운은 쇠하는데, 마음만은 아직도 어지럽습니다.
아딜라를 꼭 한 번 다시 보고 싶어요. 단 한 번이면 됩니다.
먼발치에서라도 상관없어요.
라이트 (완전히 사랑에 취했구만...)
갈립 전 북쪽의 외딴 마을에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오는 동안 남은 기운을 전부 써버렸어요.
흰 코뿔소 마을...까지는 더 갈 수가 없을 것 같아요.
라이트 기어코 그 마을까지 간다 하더라도, 아딜라를 찾는 데는 시간이 걸리겠지.
그리고 벌써 오십 년이나 지났어. 아딜라는 아마...
갈립 수호신이시여, 말을 고르실 필요 없습니다. 나이 든 이 몸에게 죽음이 더는 낯설지가 않아요.
아딜라가 이미 세상을 떠났을지 모른다는 말씀이시죠?
라이트 그래...
갈립 그녀가 이미 죽고 없더라도, 그녀의 후손이라도 찾고 싶습니다.
그녀를 추억할 수 있는 유품이라도 받을 수 있다면, 그러면 이 회한도 풀리겠지요.
갈립이 나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갈립 위대한 수호신이시여, 이게 제 마지막 소원입니다.
하늘이 내리신 그 지혜로, 아딜라를 찾는 걸 도와주십시오!
- 승낙한다
라이트 그 얘기 꽤 감동적이었어. 청을 들어주도록 하지.
갈립의 눈에서 눈물이 솟아나더니, 입술이 마구 떨리기 시작한다.
라이트 걱정 말라고, 그 여인을 찾을 수 있게 힘을 보탤 테니까.
- 거절한다
라이트 미안하게 됐어. 당신 얘기를 들어주는 건 상관없지만, 덧없는 인간의 소망을 이뤄주는 건 내 소관이 아냐.
(지금 가진 힘이 얼마 되지 않으니, 되도록 어디 휘말리지 않는 게 나아.)
(그리고 그 보석도 찾아야 하고. 괜히 일을 더 만드는 건 피해보자고.)
갈립 그렇군요...
휴...알겠습니다, 제가 그저 못 이룰 꿈을 꾼 모양이네요.
갈립의 눈이 점차 빛을 잃어가는 걸 보니,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라이트 하지만...당신의 진심에 감동받았어. 이번 일은 예외로 칠게.
갈립 정말이십니까?!
오 위대한 수호신이시여, 이, 이를 어떻게 감사드려야 할지!
라이트 강력한 힘은 있어도, 나라고 사람들 사이에서 다니는 게 쉽지는 않아.
그러니 어떻게 도와줄지는 생각 좀 해 볼게.
일단 좀 쉴 곳을 찾아 거기서 내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건 어때?
갈립 네, 네, 그러믄입죠!
라이트 (세상에, 대체 얼마나 큰일에 휘말린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