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로 돌아와 지나와 나는 흰 코뿔소 마을에서 쫒겨난 귀족들의 자취를 찾아나선다.
라이트 그들에 대해 아무것도 찾을 수가 없어!
아딜라와 그 자손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리는 없어. 분명히 뭔가 있어.
지나 대책없이 묻고 다닐 수는 없어요. 도움을 좀 구해야겠어요.
라이트 누구 생각나는 사람 없어? 이미 이름 좀 있다는 학자들하고 노련한 모험가들은 다 찾아갔잖아.
지나 흠, 우리 아직 신밧드 씨에게는 안 물어봤잖아요. 누가 알아요?
흰 코뿔소 마을 귀족들의 후손에 대해 뭐라도 알고 계실지.
라이트 그 주책바가지가 이 일에 대해 뭘 알려나?
그냥 현상금을 걸어 보는 건 어때. 광 나는 금붙이 몇 개 만들어내는 건 일도 아니라고.
지나 아뇨, 그 방법은 쓰지 말자고요.
신밧드 씨가 일처리가 확실하고 발도 넓은 건 알죠. 외국에도 친구가 있으시다구요.
마스터의 도움을 얻는 게 지금 우리 방식보단 백 번 나아요.
라이트 흠...
지나 아! 카히르도 있었네요!
라이트 카히르? 네가 항상 얘기하는 그 깍듯한 애송이?
그 귀족들이 25년 전에 도시에서 쫒겨간 건 잊었어? 그때 그 녀석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을걸.
걔가 아딜라에 대해 뭘 알겠어?
지나 그렇게 카히르를 낮잡아 보지 마세요.
그는 아는 게 많고, 역사 기록에도 두루 손댈 수 있다고요. 또 우릴 기꺼이 도와줄 거에요.
쫒겨난 귀족들의 행방이 왕실 서고에 기록으로 남아있을지도 몰라요.
라이트 그 녀석에 대해 아는 것도 참 많으셔. 둘이 그렇게 친해?
지나 아-아니에요! 그냥 친구일 뿐이에요.
뭐라 설명할 수는 없지만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온다.
라이트 그냥 친구? 하, 미안한데 내 생각엔 그것도 네 희망사항인 것 같은데.
그 왕자는 안 그래도 할 일이 산더미인데, 널 위해서라면 매번 시간을 내 주잖아.
또 그 뚱보 말인데, 넌 그냥 그 사람의 직원이잖아. 그자가 애써서 널 도와주려 할까?
지나 그 두 사람 다 친절하고 선량한 사람이라 그런 거에요.
계약을 맺고 나서야 날 도와주려는 누구하곤 다르죠.
라이트 누구하곤?
흥, 뭐든 일을 같이 하려면 계약이 뒷받침돼야 하는 건 상식이야.
지나 진정한 친구는 그런 규칙이나 체면치레 없이도 서로 도와주는 법이에요.
나는 신밧드와 카히르가 최선을 다해 우릴 도와줄 거라 믿어요.
라이트 순진하기도 하지.
굳이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난-
- 신밧드
라이트 별 기대는 안 하지만 적어도 그 뚱보하곤 안면이 있으니까.
궁전에 갇혀 사는 왕자보단 세상 경험 많은 모험가가 훨씬 잘 알겠지.
지나 카히르하고 척이라도 진 거에요?
카히르는 당신 얘기하고 전혀 다른 사람이에요. 기회가 있으면 꼭 만나봐요.
라이트 됐어. 왕족이나 귀족하고 어울려 지내는 덴 전혀 관심 없다고.
수다는 이쯤 하자. 이제 그 뚱보를 일에 끌어들여야지.
- 카히르
라이트 그 애송이 왕자가 정말 능력이 괜찮은지 보자고.
지나 카히르하고 척이라도 진 거에요?
카히르는 당신 얘기하고 전혀 다른 사람이에요. 기회가 있으면 꼭 만나봐요.
라이트 됐어. 왕족이나 귀족하고 어울려 지내는 건 피곤한 일이라고.
그냥 왕실 서고에서 필요한 걸 좀 찾아내고 싶을 뿐야.
지나 좋아요. 그럼 거기로 가보자고요.
조사를 이어오던 지난 며칠간 기력이 많이 떨어졌다. 나는 램프로 돌아가 지나가 소식을 가져오길 기다린다.
오후가 되자 지나가 마침내 나를 소환해 낸다. 어쩐지 서글프고 맥없어 보인다.
라이트 건진 게 별로 없나 봐?
지나 그 반대에요. 아딜라가 어떻게 됐는지 알아냈어요. 그치만...
지나가 얼굴을 찌뿌리며 대답을 망설인다. 뭔가 잘못된 게 분명하다.
라이트 ...아딜라가 죽은 거야?
안된 일이긴 하지만, 그녀의 후손이라도 찾을 수 있다면...
지나 아뇨, 우리가 상상했던 것보다 상황이 안 좋아요.
지나가 색이 바랜 양피지 하나를 건넨다. 어두운 색의 필체가 보자마자 내 눈을 사로잡는다.
지난 몇 년간 풀문 킹덤에 일어난 자연재해의 기록이다.
라이트 25년 전이라면 분명...
지나 풀문 킹덤 45년의 일이에요.
양피지를 훑어보는데 불안이 점점 커진다.
라이트 풀문 킹덤 45년, 동부 지방 국경지대에 모래폭풍이 불어닥쳤다.
그곳에 있던 여행자 무리가 모래 폭풍에 휘말렸고...살아남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얼떨떨한 채 찬찬히 다시 읽어본다.
지나 25년 전, 흰 코뿔소 마을이 점령되고 나서 쫓겨난 귀족들 대다수는 다른 나라로 망명 나갔고, 그들의 소식은 알려진 게 없어요.
딱 한 가문만이 풀문 킹덤의 초청을 받아들여 동부 지방으로 찾아왔죠.
바로 그들이 모래 폭풍에 휘말려 모두 희생된 거에요.
라이트 방금 망명한 사람들 대다수가 다른 나라로 갔다고 하지 않았어?
아딜라네 가문이 풀문 킹덤의 초청을 받은 바로 그 가문이라는 건...너무 우연의 일치 아냐?
지나 모래 폭풍이 지나고 폐하께서 몇 차례 조사를 명하셨어요. 잔해에서 발견된 귀족들이 바로 그 희귀한 유목민 혈통이었대요.
그 예상치 못한 재난에 쓸려간 부족이 그 고대 유목민 부족이었던 거에요.
라이트 아딜라의 후손이라곤 남아있지 않구나...갈립이 아딜라의 유품을 얻을 방도도 없어.
지나가 고개를 떨구고 한숨을 쉰다.
손 안의 양피지를 그러쥔다. 분노가 마음 가득 차오른다.
라이트 아딜라는 자기 부족이 더 나은 삶을 살게 해 주려고 자기 자유를 희생했어.
하지만 결국 이들은 전쟁의 고난에 시달리다 목숨까지 잃었어.
그녀의 희생이 아무 의미 없었던 거야!
마치 나 스스로가 그 운명의 전철을 밟았던 것마냥, 나는 슬픔에 짓눌린다.
지나 의미없는 희생이 아니에요. 다들 덧없고 예측할 수도 없는 인생을 한탄하곤 하죠.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고서 선택해야만 하는...
하지만 우리가 앞일을 모르기 때문에 비로소 그 희생, 그 선택들이 의미있게 되는 거에요.
라이트 우리 이 소식을 갈립에게 어떻게 전하지...
그가 견디기 너무 버거운 진실 아닐까.
생각을 거듭한 끝에 나는 이렇게 마음먹는다-
- 진실을 얘기한다
지나 진심이에요?
라이트 갈립은 진실을 전부 알 자격이 있어. 그는 이 일에 붙잡혀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어.
아무리 잔인해 보여도, 우리가 그에게 진실을 숨길 자격은 없어.
지나 맞아요. 어쨌거나 이건 갈립과 아딜라 사이의 일이에요.
- 그를 위해 진실을 숨긴다
지나 진심이에요?
라이트 갈립의 마지막 소원을 이런 식으로 매듭짓는 건 그에게 너무 잔인해.
그냥 아딜라의 후손이 다른 나라에 살고 있어서 그들을 찾을 수 없었다고 전하겠어.
지나 그게 최선일지도 몰라요. 적어도 그가 희망을 완전히 잃진 않을 테니까.
지나 어려운 결정이었을 텐데. 라이트, 당신이 자랑스러워요.
라이트 내일 아침이 되는 대로 갈립에게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