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타임프린세스] 통곡의 벽 외전 1-8

마야마얌 2022. 2. 16. 22:19

마음의 결정을 내렸지만, 상심한 갈립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다.

지나 라이트, 기다려요.

떠나려던 그때 지나가 내 소매를 잡아당긴다.

라이트 널 거기 데려갈 순 없어. 그 고대 도시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고.
지나 아뇨, 그냥 이걸 갈립에게 전해주세요.

지나가 황금빛 씨앗을 내게 보여준다.

지나 센티멘탈 아카시아에서 딴 씨앗이에요. 흰 코뿔소 마을의 그 목수에게 부탁했더니 내게 줬어요.
이게 아딜라의 유품을 대신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라이트 아! 그래서 어제 길 묻는 데 그렇게 오래 걸렸던 거구나.

나는 주저하며 지나에게서 씨앗을 받아든다.

라이트 왜 그때는 말하지 않았어?
지나 아딜라 일이 이리 될 줄은 몰랐지만...우리가 그녀를 못 찾을 거라는 생각에 내내 시달렸어요.
그치만 당신마저 희망을 잃지는 않길 바라서, 그저 혼자만 품고 있었어요.

지나는 흰 코뿔소 마을에서부터 쭉 날 격려해 주고 있었던 거다. 따스한 온기가 온몸 가득 퍼진다.

라이트 (정말 세심하고 사려깊은 아이네.)
고마워, 지나.

나는 귀하디 귀한 보석이라도 되는 양 조심히 씨앗을 주머니에 넣는다.


마법의 힘을 빌어 나는 사막 깊은 곳의 고대 도시로 향한다.
갈립은 폐허 근처의 다 낡고 허물어져 가는 쉼터에 있다.

갈립 통곡의 벽의 수호신이시여! 드디어 오셨군요!
쭉 돌아오시길, 아딜라의 소식을 가져오시길 기도하고 있었답니다.

신이 난 갈립의 모습이 오히려 마음을 더욱 힘들게 한다.
그럼에도 나는 계획한 대로, 갈립에게 그녀의 '최후'까지 모든 것을 낱낱이 전한다.

갈립 그렇군요...

갈립이 입술을 꽉 깨문다. 한참을 그는 말이 없다.
긴 침묵이 지나고, 그는 주름진 손으로 눈가에 차오른 눈물을 훔친다.

갈립 제게 모든 걸 전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라이트 미안해. 아딜라를 찾지도, 그녀의 후손을 찾지도 못했어.
하지만 전해줄 것이 하나 있어.

나는 황금빛 씨앗을 갈립에게 건넨다.

갈립 이건...
라이트 센티멘탈 아카시아에서 딴 씨앗이야.

갈립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날 바라본다.

갈립 금빛으로 빛나는 센티멘탈 아카시아의 모습은 가히 장관이지만, 이 나무는 그 고대 도시의 폐허 근처에서밖에 자라지 않아요.
우리가 이 폐허에 야영지를 차렸던 오십 년 전, 아딜라는 그 아름다운 광경에 넋을 놓고 바라봤죠.
하지만 그 나무는 말라버린 지 오래입니다. 어디서 이걸 구하신 건가요?!
라이트 흰 코뿔소 마을에서 센티멘탈 아카시아 한 그루를 발견했어.
모래와 바람이 그 오랜 세월을 뒤흔들었어도, 나무는 계속 꽃피우고 있었지.
아딜라가 널 위해 심은 거야.

떨리는 손으로 갈립은 손바닥 위에 씨앗을 감싸쥔다.

갈립 한번은 아딜라가, 만일 우리가 유랑 생활을 끝내는 날이 오면...
사랑하는 사람과 조촐한 집에 살면서, 마당에 센티멘탈 아카시아를 심고 싶다고 했었어요.
정말 그 씨앗을 가져가서 흰 코뿔소 마을에 심었군요...

주름이 자글자글한 그의 얼굴 위로 눈물이 쏟아져 내린다.

갈립 정말 감사드립니다! 제게 이루 말할 수 없이 소중한 거에요.
드디어 아딜라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게 됐어요.
우리가 다시 만날 수는 없겠지만...그간 서로를 추억하며 남은 생을 살아왔고, 또 살아가겠군요.

갈립은 씨앗을 꼭 쥔 채 창밖을 뚫어져라 바라본다.

갈립 저와 하나만 더 약속해 주시겠습니까?
라이트 무슨 약속?
갈립 이 씨앗을 저와 함께 심어 주시겠어요?
라이트 물론이지.

우리는 다시금 폐허에 도착한다. 멀지 않은 곳에 말라버린 센티멘탈 아카시아가 부드러운 바람에 나부끼고 있다.
갈립은 통곡의 벽 바로 옆에 황금빛 씨앗을 심는다.

갈립 제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대 도시의 벽들을 바라보며 갈립이 긴 한숨을 쉰다.
다음 순간, 갈립의 얼굴에 진 주름과 턱수염이 흐려져 간다. 그의 흐려진 눈이 별안간 또렷해지고 밝게 빛난다.
갑자기 눈앞의 주름진 노인이 잘생긴 청년으로 변한다.

라이트 갈립 너....이게 무슨...?

내 눈을 믿을 수 없을 지경이다.

갈립 그간 속여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믿어주세요, 악의는 없었습니다.
오십 년 전, 도적떼가 침입해 왔을 때 전 그들의 손에 목숨을 잃었어요. 아딜라를 지키려다가요.
죽고 나서 증오와 분노로 가득 차, 그만 악한 정령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죠.
그 뒤로 저 또한 악령이 되어 이 폐허에 붙잡혀 있었던 거에요.
라이트 당신과 아딜라를 갈라 놓은 건 죽음이었군...상상도 못했어.
갈립 이 폐허가 늘어선 곳을 오십 년 내내 떠돌았어요.
마침내 당신이 내 간절한 소망을 들어준 거에요. 이제 마음의 평화를 되찾았습니다.
라이트 오십 년 동안 아무도 당신을 안 도와준 거야?
갈립 평범한 사람들은 절 볼 수조차 없고, 몇몇 마법사의 후손들이 제 존재를 느끼곤 했죠.
하지만 도움을 구할 때마다 매번 거절당했어요.
당신만이 마음 써서 제 얘기를 들어준 거에요. 당신과 저...우린 같은 존재인 게 느껴져요.
라이트 그러니까 애초에 내가 인간도, 통곡의 벽의 수호신도 아닌 걸 알고 있었구만.
갈립 제 생각에 당신도, 결코 잊을 수 없는 뭔가에 붙잡혀 이런 모습이 된 거겠죠.

뭐라 대꾸해야 좋을지 몰라 나는 그저 얼굴을 찌푸린다.

라이트 (그게 정말 잊지 못할 일이라면, 왜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는 거지?)
갈립 당신도 이만 놓아줘야 해요.
지난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 통곡의 벽에 찾아와 후회와 한탄을 늘어놓았죠.
더러는 결코 잊는 법이 없이 어떻게든 일을 고쳐보려고 노력했지만, 그 마음은 평화를 찾지 못하더군요.
또 더러는 시간의 흐름에 내맡기는 법을 배워 갔지만, 그 마음엔 여전히 슬픔이 드리워 있었고요.

갈립이 허리를 숙여 씨앗 근처의 흙을 토닥인다.

갈립 인생은 후회로 가득해요. 과거라는 감옥에 갇히지 말아요.
나처럼 되지 말기 바라요.

갈립의 말을 곱씹어 보게 된다. 또 한번 과거를 떠올려 보려고 해 봐도, 역시 소용이 없다.
그저 복잡하게 얽힌 감정들에 사로잡힐 따름이다.
미처 알아차리기도 전에 그때 사막에서의 하룻밤을 떠올린다.
불가에서 지나가 얘기하는 동안, 그애의 눈은 결의로 반짝이고 있었다.

라이트 지나, 네가 아딜라였다면 어떻게 했겠어?
지나 나라면 부족을 버리고 갈립과 함께 도망칠 수는 없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얼굴 한 번 못 본 귀족과 결혼하겠다고 자유를 희생하지도 않았을 거에요.
라이트 무슨 생각이야? 다른 선택지라도 있다는 거야?
지나 당연하죠! 왜 꼭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해요?
남의 보호에 의지한다는 건 수동적이 된다는 거에요. 고작 안정을 위해 남에게 날 내주진 않을래요.
얼마나 어렵든, 내 손으로 내 인생을 바꾸고 싶어요.

지는 석양의 눈부신 주홍빛이 사막을 덮기 시작하며, 내 마음을 어루만진다.

라이트 만일 과거가 그저 후회로 가득하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건-

  • 묻어두고 새로 시작한다

라이트 내가 바꿀 수 없는 일을 후회하느니, 역사의 뒤안길에 영영 남겨두고 가겠어.
하지만 과거를 묻어두기 전에 일단 기억을 되찾아야 해.

  • 받아들이고 마음에 지고 간다

라이트 고통도, 후회도 모두 내가 살아왔다는 증거야. 그냥 묻어버리는 건 겁쟁이나 하는 짓이야.
설령 지독하게 괴로운 기억이라도 일단은 되찾아야 해.

나는 마음 속 결심을 소리치며 먼 지평선을 바라본다. 대답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돌아보니 갈립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다 허물어진 쉼터도 사라진 지 오래다.

라이트 자기 저주를 떨치고 자유를 찾은 걸까? 아니면 영영 사라진 건가?

잠시 나는 할 말을 잃는다.
모래가 폐허를 돌며 바람에 날린다. 통곡의 벽이 다시금 흐느끼는 듯하다.
이번에는 평화가 주위를 감싼다.

결말 [사막의 아리아] 획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