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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급자족 한정 스토리: 풀문 킹덤의 크리스마스(?)

마야마얌 2021. 12. 22. 19:06

※2-9 엔딩 중 '사랑의 라이벌' 이후 시점
※게임 속 주인공 엠마 =/= 마법 램프 지나


한 해의 마무리를 기념하며, 오늘따라 유난히 떠들썩한 신밧드의 연회.
이야깃거리로 가득한 신밧드의 집에는 늘 각지의 손님들이 몰려들어 신기한 이야기를 늘어놓지만, 얼마 전 상륙한 외국 상단의 손님들까지 더해져 오늘은 저택의 회랑이 더욱 붐빈다.

지나는 늘 그래왔듯 신밧드의 말장단을 맞추면서 그가 만취하지는 않는지 살피고 있고, 곁에는 푼기를 든 라이트가 악사 행세를 하고 연회장 한켠에 앉아 있다.
신밧드와 상단의 가족들은 이제 알음알음 이 짖궂은 마신을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아무 데서나 나 지니요, 하고 내놓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니 - 보는 눈이 많은 곳에서 약간의 눈속임은 어쩔 수 없다.

산해진미와 잘 빚은 야자주를 즐기면서, 잊을 만하면 기이한 푼기 소리가 분위기를 띄워 연회는 점점 절정을 향해 간다.
타고난 이야기꾼인 신밧드가 또 놀라운 이야기를 시작하자, 그를 빼곡히 둘러싼 청중들이 귀를 기울이며 조용해진다.

"지나, 크리스마스라고 들어 봤니? 여러분, 북왕국의 이 특별한 전통에 대해 얘기해 드릴까요?"
얼굴이 유난히 흰 북왕국의 상단이 선물용의 독특한 향료와 비단, 눈부신 보석들을 찾아 이 시기에 특히 자주 찾아온다고.
그렇게 사간 귀한 재료들은 사철 푸른 '바늘 잎' 나무에 달 장식이 되고, 또 사랑하는 가족과 연인에게 줄 비밀스런 선물로 둔갑한단다.
수줍은 소원과 함께 머리맡에 양말을 걸어 두면, 초생달이 걸린 겨울날 한밤중에
붉은 옷을 입고 괴상한 모자를 쓴, 거대하고 뚱뚱한 지니가 날아다니는 마차를 타고 그 선물들을 나눠준다고.

선물 이야기가 나오자 아까부터 라이트를 곁눈질하던 지나가 눈을 굴리더니, 그의 귀에 대고 작게 속삭인다.
"내가 아는 지니는 남에게 선물을 주고 그러진 않던데...바다 건너 지니는 참 상냥하네요."
"지나, 그거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야?"
"그럴 리가요, 악사 선생님께서 지니랑 무슨 상관이 있다고."
지나가 라이트만 보이도록 작게 혀를 내밀고는, 씩씩대는 그의 얼굴을 뒤로하고 신밧드의 얘기에 다시 집중한다.

"북왕국의 크리스마스에는 눈이 내린다는구나. 우리 왕국의 수도에도 비가 가끔 내리잖니?
하지만 눈은 비보다 훨씬 차갑고, 하얗고, 또 포슬포슬하단다!"

얼근하게 취해 신이 난 신밧드가 지난 항해에서 설원에 갔던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한다.
북서쪽의 설산에는 매일같이 눈이 내리고, 위험할 정도로 매서운 칼바람이 몰아치지만
그 끝 외진 곳에는 눈 결정이 찬란히 빛나는 얼음 동굴이 있어, 한 번 본 사람은 그 아름다움을 잊을 수 없다고 한다.

태양빛이 사시사철 내리쬐고, 비조차도 몇 달을 기다려 겨우 내리는 풀문 킹덤에서 눈을 실제로 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수 차례 뽑아낸 명주실보다도, 아기새의 솜털보다도 가볍고 보드랍지만
닿은 살이 에일 정도로 희고 차가운, 눈!
이 미지의 신의 걸작에 대해 들은 지나의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

"라이트, 마법으로 눈을 내릴 수도 있어요?"
연회가 파하고 자리를 정리하는데, 등뒤로 불쑥 날아오는 한마디에 뜨끔하는 라이트.
"큼큼, 당연하지! 램프의 마신을 얕보지 마-"
짐짓 태연한 척 뒤를 돌아보는데, 그만 지나의 사슴마냥 초롱초롱한 눈과 마주쳐 버린다.
"눈이 어떻게 생겼는지 너무 궁금해요, 한 번만 보여줘요!"
"흥, 그건 안 돼."
"왜요?"
"잊었어? 함부로 램프의 마법을 사용하지 말자고 얘기한 건 지나 너야."
보석이 제자리로 돌아온 덕에 라이트는 어떤 소원이든 빌 수 있었지만, 기술과 과학을 사랑하는 풀문 킹덤의 시민들에게 혼란을 주지 않기 위해 정말 필요한 때가 아니면 램프는 쓰지 않기로 지나와 약속했었다.
"잠깐 눈을 내린다고 큰일나는 건 아니잖아요."
"그렇게 마음대로 어길 거면 약속하는 의미가 없잖아. 나도 정말, 간절히, 진심으로 네 소원을 들어주고 싶지만-"
"자기 먹고 싶은 게 있을 때는 마법으로 잘만 만들어 먹으면서."
"...하여튼 안 돼...!"
애써 눈을 피하는 라이트에 지나는 잠깐 입을 삐죽대더니, 더는 말하지 않고 자리를 뜬다. 라이트의 들릴 듯 말 듯한 외침을 뒤로 한 채.
"다시 말하지만, 절대 내가 눈이 뭔지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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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회가 끝난 다음날 아침, 뜻밖에도 신밧드 상단이 이른 대낮부터 북적인다.
왕실 휘장을 단 낙타 몇 마리가 상단 앞마당에 들어와 앉았다 - 등에는 진귀한 이국의 물건들을 가득 실은 채.
뜻밖의 소란에 어리둥절한 라이트를 두고 지나가 물건 정리에 열심이다.
"에, 이게 다 뭐야?"
"그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러 온 북왕국의 상단이 엊그제 왕궁에 다녀가면서 답례품을 잔뜩 남기고 갔대요.
카히르가 크리스마스 얘기를 듣더니, 몇 개를 선물로 주고 싶다고 했어요."
지나와 신밧드를 각별히 생각하는 카히르의 평소 성품을 생각하면 이상한 일도 아니지만, 라이트는 어쩐지 그의 호의가 달갑지 않다.
"흥, 이런 건 마법으로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어!"
"함부로 말하지 말아요, 라이트. 마법으로 아무리 비슷한 걸 만든대도, 선물에 담긴 사람의 마음까진 만들어낼 수 없을걸요."
그 말에 더욱 빈정이 상한 그가 짐짓 허세를 부리기 시작한다.
"내 말은, 내가 널 위해 훨씬 더, 아주 특별한 선물을 생각해 두고 있다는 거야."
"진짜? 뭘 해 주게요?"
"...."
"난 필요한 것도, 갖고 싶은 것도 없는데. 이 고집쟁이 램프의 지니 씨께 뭘 받으면 좋을까?"
갑작스런 되물음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라이트의 코앞에서 지나가 장난기 가득한 함박웃음을 짓는다.
"아, 있다. 날 위해 눈을 내려 주면 되겠네요!"


야자수 그늘 밑에 혼자 앉은 라이트의 뒷모습이 어쩐지 처량하다.
'무엇이든 해내는 램프의 마신'이라며 큰소리를 쳐두긴 했지만, 한 번도 보지 못한 뭔가를 만들어 내자니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하얗고...포슬포슬한....눈을 내려라!"
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공중에서 밀가루 한 무더기가 쏟아져 내린다.
고운 가루가 사방에 흩날리고, 산더미 같은 밀가루에 파묻힌 라이트가 잔기침을 하며 겨우 빠져나온다.
"칫, 그럼 이번엔 비처럼 축축한데...또 차가운...눈을 내려라!"
이번에는 작은 우박이 머리 위로 후두둑 쏟아지는 통에, 라이트가 머리를 싸쥐고 아파하는 사이 바닥은 온통 물바다가 된다.

'그냥 눈 말고 다른 선물을 줄까?'
하지만 방금 전 그 기대하는 눈빛이 머리를 가득 메워 도통 떨칠 수가 없다.
'오, 위대한 램프의 마신님! 이렇게 아름다운 눈을 내려 주시다니, 정말 대단하세요! 역시 라이트뿐이야!'
"젠장, 여기서 그만둘 수도 없고....어쩌지?"

뚱보 신밧드에게 가서 설원의 모험 얘기를 더 들어 볼까? 분명 신난 그가 하루 종일 이야기 보따리를 풀겠지만...
수다를 좋아하는 신밧드가 뭘 해보기도 전에 지나에게 다 말해 버릴 게 틀림없다.
카히르에게 왕실 역사서를 빌려 달라고 할까? 눈에 대해 좀더 자세히 쓰여 있지 않을까?
아서라, 잠시 고민하던 라이트가 세차게 고개를 젓는다.
위대한 램프의 지니가 이런 일로 또 샌님 왕자의 힘을 빌릴 수야 있겠는가.
그가 지나를 위해 준비한 근사한 선물들을 생각하니, 더더욱 카히르의 도움을 받기가 꺼려진다.

한참을 고민하던 그가 드디어 마음을 정했는지, 일어나 비행 마법 주문을 외우기 시작한다.
"이 몸이 직접 알아보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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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참, 마신도 감기에 걸리나요?"
이틀째 심한 열로 자리보전을 하는 라이트에게 지나가 볼멘소리를 늘어놓고 있다.
"요 며칠은 통 보이질 않더니, 또 어제부터는 독한 감기에 걸려 나타나서, 이젠 내 침대까지 자기가 점령하고....!"
"지나, 아픈 사람에게 자꾸 잔소리할 거야?!"
"배고프고 아프고 다 할 거면, 마신이나 사람이나 무슨 차이인가 싶어서요,"
덕분에 선물은커녕 챙겨야 할 일거리만 늘어난지라 토라진 기색을 굳이 감추려고도 않는 지나.
그래도 이 못말리는 환자를 위해 김이 폴폴 나는, 갓 만든 렌틸콩 수프 그릇을 건네는 건 잊지 않는다.
"흥, 라이트에게 뭘 기대한 내가 바보에요."
"지나, 계속 그럴 거야? 내가 뭐 때문에 지금...!"
그가 말을 이으려다 말고 황급히 자기 입을 틀어막더니 기침하는 척 슬쩍 말끝을 흐린다.
"콜록, 콜록!.....아이고, 나 죽네."
"엄살은!"
"아까 구워준 과자 하나만 더 먹으면 괜찮아질 것 같기도 하고...."
아이처럼 칭얼대는 라이트를 보며 한숨을 쉬면서도, 상냥한 지나는 아까 만든 과자를 더 가져오려 자리를 뜬다.

밤새 앓던 라이트가 잠시 눈을 떴을 때, 이미 조각달이 하늘 저편에 걸려 있었다.
몸을 일으키니 이마에서 덜 마른 수건이 툭 떨어진다.
돌아보니 침대 머리맡에 엎드려 조는 지나의 옆에, 얼마나 적셔뒀는지 모를 몇 장의 수건과 물양동이가 널브러져 있다.
밤새 이마의 물수건을 갈아준 것일까?

의지할 데 없는 모든 사람들에게 따뜻한 집을 달라는 소원을 빌었었지.
그렇게 생겨난 고아원을 돌보고, 신밧드의 상단까지 관리하는 지나의 잠든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지만,
마침내 원하는 대로 모두와 삶을 나누게 된 그녀의 뺨에는 생기가 가득하다.
얕은 코골이는 처음 만난 때와 다름없지만 이제는 고양이의 골골 소리처럼 편안하고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
얼굴에 내린 잔머리를 정리해 주는 라이트의 눈에 복잡한 감정이 스쳐지나간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라이트는 곤히 자는 지나를 안아들고 침대에 눕힌 다음, 덮고 있던 담요로 몸을 둘둘 감아준다.
그리고는 잠시 달빛에 비친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조용히 램프로 들어간다.


북왕국의 상단이 예의 크리스마스 선물들을 싣고 본국으로 물러간다. 아무리 사소한 물건도 이 계절에는 특별한 선물이 되어 가족들, 또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마음을 전할 것이다.
램프 안에서 며칠을 쉰 라이트는 몸이 조금 나아진 듯하다. 슬쩍 나와 고아원 마당에 가보니, 아이들이 뛰어다니며 까르르 웃는 소리가 사방에 가득하다.
보아하니 지나가 며칠 전 들어온 왕실 선물을 아이들에게 막 나눠준 참이다.

"왔어요, 이제 몸은 괜찮은 거죠?"
"지나, 같이 갈 데가 있어."
"또 땡땡이 칠 생각일랑 말아요, 이번 주는 고아원과 상단 일만 챙겨도 충분히 바쁘니까."
도끼눈을 뜬 지나에겐 아랑곳 않고, 라이트가 손가락을 탁 치는 소리와 함께 지나의 옷이 순식간에 두꺼운 사막 전통복으로 바뀌었다.
"따뜻하게 챙겨입지 않으면 후회할 거야."
"라이트!"
지나가 미처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익숙한 황동 팔찌가 허리를 휘감더니,
수상한 연기와 함께 두 사람이 갑자기 자취를 감춘다.

지나가 조심히 눈을 뜨자 서늘하고 상쾌한 바람이 얼굴을 감싼다.
어디를 보아도 온통 눈부시게 하얀 세상.
거대한 수정 같은 얼음 기둥, 요정처럼 나풀나풀 떠다니는 눈 결정들,
진주 가루를 뿌린 듯 반짝이는 눈바닥, 동굴 저편에서부터 번져오는 신비한 푸른 빛.
신밧드가 말한 바로 그 얼음 동굴이다.
"우와아....."
눈을 만져도 보고, 후- 불어도 보고, 살포시 발자국도 만들어 보는 동안 그녀의 입에서 줄곧 탄성이 터져나온다.
"그땐 그냥 라이트를 골려주려던 건데, 정말로 눈을 보여줄 줄은 몰랐어요..."
"여길 찾느라고 설원을 얼마나 헤매고 다녔는지."
우쭐한 표정을 한 그가 마법을 부려 주변의 공기를 약간 데운다 - 덕분에 추위 속에서도 두 사람은 팔다리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
"처음엔 눈이란 게 어떻게 생겼는지만 보고 오려 했는데, 눈이 내려 쌓인 여기가 훨씬 예쁘더라고.
어때, 마법으로 만든 것보다 백 배는 근사하지?"
한껏 의기양양한 라이트와는 달리, 마냥 좋아할 줄만 알았던 지나는 의외로 마음 아픈 표정이다.
"여길 찾겠다고 감기에 걸려서 온 거에요?"
"...."
"다음부턴 그러지 마요, 내가....내가 속상하잖아."
입을 비죽이는 지나를 본 라이트는 그저 멋쩍게 웃으며 뒤통수만 긁을 따름이다.
"...특별한 선물을 주겠다고 약속했으니까, 그걸 지킨 것뿐이야."

갑자기 지나가 두 팔 사이로 쏙 안겨들어와, 라이트는 거의 미끄러져 넘어질 뻔한다.
"나도 준비한 게 있어요,"
지나의 품안에서 푹신푹신한 작은 솜인형이 하나 나온다. 털실로 만든 갈기가 찰랑이고, 작은 눈과 코는 까만 단추로 달랑거린다. 꼬리에는 파란 리본이 매어져 있다.

"....이거, 사자...."
"내가 만든 인형이 갖고 싶다면서요?"
아, 그 때 그거.
망가진 낙타 인형을 두고 벌어진 아부와의 유치한 싸움을 줄곧 기억해 뒀었나 보다.
"당신이 안 보이는 며칠 동안 만들었어요.
난 귀한 물건을 구할 수도, 마법을 부릴 수도 없지만...어때요, 맘에 들어요?"
확실히 실밥이 여기저기 튀어나온, 애들 장난감에 지나지 않는 서툰 솜씨의 인형이다. 그러나 황금 동굴에 숨겨진 산더미 같은 보물을 전부 다 준대도 이 앙증맞은 사자를 대신할 수 없으리라.
이 순간 그의 푸른 눈이 얼음 동굴을 가득 채운 빛보다도 더 반짝인다.

"응, 정말 최고야."


부드러운 눈 결정이 볼을 간질인다.
따스한 입김이 얼굴을 녹인다.
어쩐지 입술에 따뜻한 게 닿은 느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