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 램프 중대 스포일러 주의
"이제 라이트가 있으니, 왕국 역사 기록을 하나하나 되짚어볼 수 있겠어요."
라이트의 특별한 정체가 드러난 후로 유독 신나 보이는 사람이 바로 카히르다.
그 거대한 서고의 주인, 이름난 공부벌레, 연구와 토론을 위해 태어난 그가 잊혀진 역사의 산 증인을 이대로 놓칠 리가 없다.
그가 비밀리에 왕실 서고로 대학자들을 초청해 70년 전 기록들을 갈무리하는 낭독회를 열었다.
물론 오늘 행사의 주역은, 위대하신 왕국의 조상님 되시는 아슬란 파티흐다.
"왕위에 오르면 서고를 모두에게 개방할 거에요. 왕실이 소중히 보관한 지식들을 누구나 누릴 수 있게요. 지나도 오늘 미리 와서 구경한다고 생각하면 돼요."
"대단해요...그나저나 절대 안 오려고 했을 텐데, 어떻게 설득한 거에요?"
"오늘만 협조해 주면, 왕실 요리사가 갓 만든 쿠나파*를 라이트 키만큼 쌓아올려 주겠다고 했어요."
*쿠나파: 치즈 페이스트리를 달콤한 시럽에 담가 만든 레반트 지역의 디저트 케이크.
"그거 아냐. 사냥 오두막은 왕도 밖 사막에 있었어, 전에 따라가 봤으니까.
기야스가 거기서 사람을 사냥했단 얘기도 사실이 아냐. 그냥 여우나 몇 마리 잡고 다녔지.
걔가 바람둥이였단 얘긴 도대체 어디서 나온 거야?!"
서고 문을 여니 이미 반쯤 드러눕다시피 한 라이트가 심드렁한 말투로 왕실 사료 이곳저곳을 지적하고 있다.
케케묵은 역사서를 읽어내리는 고루한 목소리와 받아적는 펜 소리로 서고 안이 조용한 가운데, 가끔 말하다 말고 어디서 바삭거리고 또 우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몇 시간씩 걸리는 지루한 낭독회에 그가 도망가지 않도록 카히르가 미리 손을 써둔 모양이다.
온갖 단내 나는 간식을 쌓아올린 탑 근처로 때마다 할바와 로쿰, 바클라바 접시를 든 시녀들이 끊임없이 오간다.
"아, 이 시에 대해서도 꼭 한 번 들어야겠어요."
조용히 얘기를 듣던 카히르가 일어나 서고에서 풀을 먹여 빳빳한 양피지 묶음을 하나 꺼낸다.
"이 싯구는 풀문 킹덤의 시조 되는 분께서 임종 자리에서 남긴 구절이에요. 왕실 자제들이라면 글을 떼자마자 반드시 암송하게 되어 있죠."
조심스럽게 두루마리를 펼친 그가 그 중 한 장을 쓸어내린다.
"파티흐 가문 사람이라면 누구나 외워 읊지만...정작 속뜻을 아는 사람은 이제껏 아무도 없었어요. 라이트가 뭔가 안다면 좋겠어요."
"그 녀석이 지은 시라구?"
"네? 네, 그게 왜..."
"풀문 킹덤의 시조라니, 그거 우리 집 둘째 얘기잖아. 걘 날 닮아서 글공부를 좋아했던 적이 없는데.
그런 녀석이 시라니...또 어디서 잘못 전해진 거 아냐?"
순간 근엄한 학자 무리 속에서 수십 개의 곤란한 눈동자가 엇갈린다.
어쩐지 다들 소매로, 책으로 입매를 필사적으로 가리고 있다. 몇몇은 탁자 아래로 숨어 뭔가 열심히 찾는 시늉을 한다.
뒤편에 양피지로 입을 가린 채 반달눈으로 웃음을 참는 지나도 보인다.
"흠흠, 라이트, 아무리 서로 형제였대도 이런 자리에선 제발 체면 좀 세워 주세요..."
헛기침으로 분위기를 진정시킨 카히르가 겨우 흐름을 이어간다.
"그럼 외워 볼게요,"
눈에 비치는
흐르는 푸른 벨벳 천
그 안에 고요한 바다가 담겨 있도다
나부끼는 비단 위로 나리는 빗방울처럼
나직한 목소리에서, 보라
끓는 용암과도 같은 분노가
터져나온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눈썰미 좋은 지나의 시선에 낭독이 이어질수록 어두워지는 라이트의 얼굴이 들어온다.
심지어 두 손이 어렴풋이 떨리는 느낌마저 있다.
두 손은 뜻한 바를 행하는 데 거침이 없으니
블가사의한 힘으로 삿된 의지를 헤치고
두 발은 뜻한 바를 좇아 나아가니
분별없는 이들이여, 그대 명줄을 재촉하지 말라
"라이트? 갑자기 왜..."
"글에 무슨 문제라도?"
"...다 나가줘. 지금 당장."
얼굴을 감싸쥔 라이트의 표정이 더이상 보이지 않는다.
갑작스런 조상님의 파업에 좌중이 술렁이는 가운데,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카히르도 외던 것을 멈춘다.
"...여러분,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저와 지나가 옆에서,"
"너희도 나가 있어."
"카히르, 그럼 잠깐만 기다려요. 내가 라이트하고 얘기해볼..."
"지나 너도."
얼결에 전부 쫓겨난 사람들이 서고 밖 복도를 가득 채웠다.
"라이트, 라이트!"
지나가 라이트의 이름을 부르며 문을 두드려도 보지만, 문 너머에서 도통 대답이 오지 않는다.
"갑자기 왜 저러는 걸까요?"
이제껏 없었던 일에 발만 동동 구르는 지나 옆에서 카히르는 골똘히 생각에 잠긴 듯하다.
이따금씩 방금 외운 시의 몇 구절을 되새기는 그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린다.
곧게 뻗은 등줄기에
어깨에는 높은 뜻을 지고
자유로이 뻗은 거친 갈기 사이로
만면에 빛나는 긍지
"몸이 안 좋은가? 간식 혼자 다 먹으려고 저러나?
라이트, 뭐라고 안 할 테니까 문 좀 열어줘요...!"
그대에게 심중을 꿰뚫어보는 지혜가 있다면
그에게서
부드러운
진솔한
날카로운
고결한 마음을
보리라.
"아하, 알겠어요. 지나,"
외마디 소리와 함께 카히르가 벽에 기댄 몸을 일으킨다.
오랜 수수께끼의 답을 알아낸 후련함이 목소리에 묻어난다.
"네? 알아내다뇨, 뭘요?"
"라이트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단지 그에게 시간을 좀 주기로 해요."
영문을 모르는 지나를 돌아보는 그의 얼굴에 온화한 미소가 떠 있다.
"70년 전 라이트가 램프를 봉인해야 했을 때 말이에요.
자기 형제들에게 뒷일을 부탁하는 편지를 남기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고 했죠.
새 시대의 주인이 되어서도, 동생은 형의 뒷모습을 쭉 기억하고 있었을 거에요...
역사 속에서 지워야 했던 그의 마지막 모습을요."
사자의 심장은 황금보다 찬란히 빛나니
안에 담긴 의지가
어느새 꺾이리라 짐작하지 말지어다
누구나가 그의 신비한 힘을 탐내나
다시 없을 그의 영광은
뭇사람의 손 닿지 않는 곳에 있도다
"그러니까 그 시는...다정하고 용감했던 큰형에 대한 그리움이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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